조항 예시
이 글은 대기업이나 투자사와 제휴·납품을 협의하면서 상대방이 보낸 비밀유지계약서 초안을 검토하는 중소 소프트웨어 개발사와 스타트업 실무자를 위한 해설입니다. 다음 상황을 가정합니다. 개발사 A는 B사와 협업 가능성을 논의하는 단계에서 화상회의와 대면 미팅을 몇 차례 열 예정입니다. A는 이 자리에서 서비스 구조, 데이터 처리 방식, 고객 확보 계획을 설명하고 개발 중인 화면도 시연하려 합니다. B사가 보낸 초안의 비밀정보 정의 조항은 '비밀' 표시가 붙은 자료만 비밀정보로 봅니다. 구두로 전달한 정보는 일정 기간 안에 서면으로 확인해 주어야 비밀정보에 포함됩니다.
이런 조항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형태를 띱니다. 비밀정보는 공개 당사자가 제공한 정보 가운데 '비밀' 또는 이에 준하는 표시를 한 서면·전자 자료로 정의됩니다. 구두나 시각적 방법으로 공개한 정보는 공개할 때 비밀임을 알리고, 공개일로부터 ○일 이내에 그 요지를 서면으로 정리해 통지한 경우에만 비밀정보에 포함됩니다. 실제 계약서 문구는 거래마다 다르므로 이 글에서는 구조만 일반화해 설명합니다. 이 글이 다루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표시를 빠뜨렸거나 사후 서면 확인을 놓친 정보는 어떻게 취급되는지, 그리고 이 위험을 줄이려면 표시 요건과 확인 기간을 어떻게 정해야 하는지입니다. 비밀유지 의무를 계약 종료 후 몇 년 동안 지킬지, 정보 등급별로 기간을 어떻게 나눌지는 이 글에서 다루지 않습니다.
조항의 의미
표시 요건은 비밀정보의 범위를 겉으로 확인할 수 있는 표지로 정하려는 장치입니다. 정보를 받는 쪽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어 관리 부담이 줄어듭니다. 반면 정보를 주는 쪽은 표시를 빠뜨리면 그 정보가 계약상 비밀정보에서 빠지는 것으로 해석될 위험을 집니다. 문구가 '표시한 경우에 한하여'처럼 한정하는 형태라면 표시가 없는 자료를 비밀정보로 주장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조항은 보호 범위를 정하는 규정이면서, 동시에 공개자에게 관리 책임을 지우는 규정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계약상 비밀정보와 법률상 영업비밀은 구분해야 합니다. 계약상 비밀정보는 당사자가 합의한 정의에 따라 범위가 정해집니다. 법률상 영업비밀은 국가법령정보센터에서 원문을 확인할 수 있는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의 정의 규정을 따릅니다. 이 규정은 공공연히 알려져 있지 않을 것, 독립된 경제적 가치를 가질 것, 비밀로 관리되었을 것을 요건으로 둡니다. 계약상 비밀정보에서 빠진 정보라도 이 요건을 갖추면 법률에 따른 별도 보호를 주장할 여지는 남습니다. 다만 상대방에게 비밀임을 알리지 않고 넘긴 사정은 '비밀로 관리되었는지'를 판단할 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표시 누락은 계약상 범위와 법률상 보호 양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후 서면 확인 기간은 범위의 문제이면서 기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구두로 공개한 정보는 확인 기간이 끝날 때까지 비밀정보인지 아닌지가 확정되지 않습니다. 이 기간을 어떻게 정하고 그동안 정보를 어떻게 취급할지 정하지 않으면, 공개 직후의 공백 기간에 일어난 사용이나 전달을 두고 다툼이 생깁니다.
분쟁이 생기는 지점
실무에서 다툼이 자주 생기는 장면은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각 장면은 표시 요건을 문언대로 적용했을 때 공개자가 보호를 주장하기 어려워지는 경우입니다.
- 설명만 하고 확인서를 보내지 않은 경우: 미팅에서 핵심 구조를 말로 설명하고 회의록이나 확인 통지를 남기지 않으면, 그 내용은 계약상 비밀정보로 인정받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 표시 없는 이메일 본문과 메신저: 첨부 파일에는 표시를 했으나 이메일 본문이나 메신저 대화에 같은 내용을 적은 경우, 본문과 대화가 표시된 자료에 해당하는지를 두고 해석이 갈립니다.
- 시연 화면: 화면 공유나 현장 시연은 자료가 남지 않아 무엇을 보여주었는지 나중에 특정하기 어렵습니다.
- 지나치게 포괄적인 확인서: '회의에서 논의된 모든 내용'처럼 쓴 확인서는 요지를 정리해 통지하라는 요건을 충족했는지를 두고 다툼이 생길 수 있습니다.
- 확인 기간의 기산점: 공개일부터 세는지, 회의록을 받은 날부터 세는지 정하지 않으면 기한을 지켰는지가 불분명해집니다.
- 확인 기간 중의 사용: 수령자가 서면 확인 전에 이미 내부 검토 자료에 반영하거나 협력사에 전달한 경우, 그 행위가 의무 위반인지가 문제 됩니다.
이런 다툼에서 법원이 계약 문언을 얼마나 엄격하게 볼지는 사안마다 다르므로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렵습니다. 당사자의 교섭 경과, 정보의 성질, 수령자가 비밀임을 알 수 있었는지 같은 사정이 함께 고려될 수 있습니다. 공개자로서는 해석에 기대기보다 기록을 남기는 편이 안전하고, 수령자로서는 표시 없는 정보도 함부로 다루지 않는 관행을 두는 편이 분쟁 비용을 줄입니다.
표시 방식별 비교
비밀정보의 범위를 정하는 방식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뉩니다. 어느 방식이 맞는지는 거래 단계, 공개할 정보의 형태, 양측의 관리 역량에 따라 달라집니다.
- 표시 한정형: 표시한 서면·전자 자료만 보호합니다. 수령자는 범위가 명확해 관리하기 쉽습니다. 공개자는 구두·시연 정보가 빠질 위험이 큽니다.
- 표시와 사후 확인 결합형: 표시 자료에 더해 구두 정보도 기한 안에 서면으로 확인하면 보호합니다. 균형은 맞지만, 공개자가 기한과 형식을 관리하지 못하면 보호가 끊깁니다.
- 성질 기준형: 표시가 없더라도 정보의 성질이나 공개 상황에 비추어 합리적으로 비밀로 인식될 정보를 포함합니다. 공개자에게 유리하지만, 수령자는 범위가 넓고 불명확하다고 보아 수정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범주 열거형: 별지에 소스코드, 데이터 구조, 원가, 고객 명단처럼 보호할 정보의 범주를 미리 적습니다. 표시 누락의 위험을 줄일 수 있으나, 열거하지 않은 범주는 빠진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생깁니다.
실무에서는 두 번째 방식을 기본으로 하고, 네 번째 방식의 범주 목록을 보충하는 조합이 자주 검토됩니다. 거래가 하도급 관계에 해당하면 계약 문언과 별도로 법령상 기준도 확인해야 합니다. 원사업자가 수급사업자에게 기술자료를 요구할 때의 서면 요구와 비밀유지에 관한 기준은 하도급법 조문과 공정거래위원회가 공개하는 표준계약서·관련 지침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해당 기준이 적용되는지는 거래 구조와 당사자 규모에 따라 달라지므로, 적용 여부를 먼저 따져 보아야 합니다.
작성 시 유의사항
사례의 A처럼 공개하는 쪽이라면 조항 문구를 고치는 일과 업무 절차를 정하는 일을 함께 해야 합니다. 서명 전에 다음 항목을 확인하는 것을 권합니다.
- 확인 기간을 실제 업무 주기에 맞춥니다. 회의록 작성과 내부 결재에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지 않고 짧게 정하면 기한을 놓치기 쉽습니다.
- 기산점을 문구로 정합니다. '공개일로부터'인지 '공개일이 속한 회의 종료일로부터'인지 적어 두면 기한 다툼이 줄어듭니다.
- 확인 기간 동안의 잠정 보호를 정합니다. 서면 확인 전이라도 기간 안에는 비밀정보로 취급한다는 문구를 두면 공백 기간의 사용 문제를 줄일 수 있습니다.
- 서면 확인의 형식을 정합니다. 이메일 통지가 서면에 포함되는지, 수신자를 누구로 하는지 적어 둡니다.
- 표시 누락을 사후에 보완할 수 있게 합니다. 표시를 빠뜨린 자료를 나중에 비밀로 지정할 수 있는 절차를 두되, 지정 전에 이미 이루어진 정당한 사용은 제외하는 식으로 균형을 맞춥니다.
- 회의 전에 공개 범위를 정합니다. 의제와 공개할 자료 목록을 미리 주고받고, 시연은 보여준 화면을 목록이나 캡처로 남겨 둡니다.
- 공개를 최소화합니다. 협업 가능성을 판단하는 데 필요한 수준까지만 공개하고, 소스코드처럼 민감한 정보는 계약 단계가 진행된 뒤로 미루는 방안을 검토합니다.
반대로 B사처럼 정보를 받는 쪽이라면, 성질 기준형 문구를 받아들일 때 범위를 한정하는 장치를 함께 요구하는 편이 합리적입니다. 이미 알고 있던 정보, 독자적으로 개발한 정보, 제3자로부터 정당하게 받은 정보를 제외하는 조항이 대표적입니다. 공개자에게 표시 관행을 지켜 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확인 기간을 며칠로 정해야 한다는 법정 기준은 없으므로, 기간은 양측의 업무 흐름을 놓고 협상으로 정해야 합니다. 이 글은 일반적인 조항 구조를 설명한 것이며, 구체적인 거래에서는 계약서 전체와 적용 법령을 함께 검토하고 필요하면 법률 전문가의 검토를 받는 것이 바람직합니다.